2008년 02월 11일
어느날 갑자기 천사가 찾아와 라면이 먹고싶다고 말했다. 1st Pot
1st Pot . 가끔은 라면 맛이 나는 변태의 키스도 당하고만 있어야 할 때가 있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라면이 보글보글 끓고 있고, 곧 완성된 라면은 식탁으로 옮겨져 내 뱃속으로 안착하실 운명이다. 가스 폭발이 일어나거나, 냄비를 떨어뜨려 화상을 입거나, 갑자기 라면이 발광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도 없다. 자취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3년째. 그동안 돈을 아끼느라 상당량의 식사를 라면으로 때웠는데, 이제 라면 끓이는 솜씨는 초 일류급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뭐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하는 게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공부도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랭크를 매긴다면 공부는 B랭크 정도, 라면 끓이기는 A+정도랄까. 그런 느낌이다.
“읏챠.”
냄비가 허공을 유려하게 가르며 식탁으로 착륙했다. 이 냄비를 옮길 때 내 코를 지나는 향기, 이거야말로 라면을 끓이는 행복감을 절실히 맛보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먹을 때의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아 정말 좋다.
“라~!”
라? 부엌 창문 밖으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내다봤는데, 허공으로 새가 한 마리 날고 있을 뿐. 별다른 것은 포착되지 않았다.
‘아니, 새치고는 좀 큰가…….’
조금 큰 새가 날아다니는 건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라면을 먹어야지. 역시 때 아닌 조류관찰 보다는 식사가 중요하다.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그 새 미묘하게 빛나고 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니, 라면 불어터질라. 새 한 마리가 참 머릿속을 꺼림칙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 배가 몹시 고프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불어터진 라면을 먹는 건 사양이다.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라면을 한가득 집어서 입속으로 직행. 소화기관으로 직행코스를 타는 면발들의 기분은 어떨까. 그런 건 생각하기도 싫지만,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다.
“진흙을 온몸에 치덕치덕 바르고는 고무장갑을 전신에 뒤집어쓰는 느낌이겠지.”
‘음. 그런 느낌인건가. 아니, 나는 말한 적 없는데 누구 목소리지?’
집에는 나밖에 없고, 가끔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관리인 아주머니뿐인데 나 이외의 남자 목소리가 이곳에서 난다면, 결론으로 집어낼 수 있는 건 하나. 도둑이 들었군. 요새 도둑은 집주인이 라면을 먹는데 옆에서 차분하게 이야기도 지껄이는가보다. 아니 그보다 최근에 도둑에게 독심술이 필수라도 된 건가? 나 혼자 머릿속으로 한 질문에 대답을 해주다니. 이거 도둑이 아니라 귀신이라도 나타났나보군.
‘귀신이라면 계속 먹어도 괜찮겠지.’
다시 라면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역시 내가 끓인 라면은 맛있어.
“그거 나도 좀 주라.”
무시하자.
“어이 듣고는 있는 거냐? 그거 그 라면 나도 좀 달라고.”
아무도 없는데 계속 시끄럽다. 허공에서 말소리가 들리다니 내가 미친 건가? 그런 건가? 아냐 배가 고파서 그럴 거다. 어서 라면을 먹자. 배를 채우면 이 요상한 소리도 사라지겠지.
“말 좀 들어라. 응? 나도 라면 좀 달라고. 저기요? 라면 좀만 주세요.”
젠장.
“야 이 씨발 잡스런 목소린 뭐냐고! 귀신이냐? 그런 거냐? 아니면 내가 미친 거냐? 아니면 도둑놈이냐? 나와 썅. 여기 나와서 지껄여봐 좀!”
영락없는 미친놈 등극. 아 축하할 일이로구나. 특급 라면 조리사인 이 몸이 이렇게 미쳐버리는구나. 당연하게도 내 지랄 맞으신 발성연습에 반응하는 물체는 집구석 어디에도 없었다. 제발 이걸로 목소리는 사라져주세요.
“이……. 이 노무 시키가 왜 성질내고 난리야! 라면 조금 얻어먹겠다는데.”
음.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라면 먹고 있는데 헛소리가 들려서 성질부렸더니 날개달린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어. 게다가 미묘하게 빛이 나고 있어. 머리가 길고, 흑발이고, 눈동자도 새까맣고 왠지 고귀하다고 광고하는 것만 같은 상판이 전라인 몸뚱이와 미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당장 사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대박이 날 것만 같은 느낌의 이 상황에 내 뇌는 연산 초과를 일으키는 듯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입에서 오류가 발발했다. 내용물이 수용범위를 초과한 것도 아닌데 씹고 있던 라면이 입 밖으로 도망을 나가면서 어느새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춰서 나를 보고 있던 그 고귀하신 노출광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변…….”
어느새 내 입이 아직 연산처리도 끝나지 않은 단어를 내뱉고 있었다. 오류난 입이 뱉어낼 라면이 모자라서 생체법칙까지 무시해가며 무언가 지껄여야 하는 모양이다.
“변태다.”
오, 빛나는 면상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말이다. 나는 너희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살고 있던, 뭐라 그러냐 그걸……. 그래, 천사. 천사다 이놈아. 너희들은 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모시고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 천사는 신보다 조금 덜 절대적인 거잖아. 그러니까 라면 내놔.”
도대체 이놈은 뭘까. 변태라는 말에 약간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씰룩거리고 있지만, 여전히 천사니, 신이니, 라면이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보아하니 도둑놈 치고는 너무 눈에 띈다. 번쩍번쩍 빛이 나다니, 이건 무슨 영화촬영용 특수효과인 건가? 아니면 이건 지금 일반인 대상 몰래카메라? 그냥 노출광인 변태라고 하는 게 제일 낫겠다.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어이, 전화라도 할 생각이냐? 어디로?”
“경찰.”
음. 그녀석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난다. 역시 뭔가 캥기는 짓을……. 아니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한가.
“이봐, 그건 관두라고. 아마 경찰 쪽에도 천사가 몇 명인가 감시 역으로 섞여있을 거란 말이야. 그보다 경찰을 부르면 너도 곤란하잖아.”
누가 곤란해. 여기는 내 집이고, 침입자는 네놈인데. 버튼을 누르자. 어서 경찰을 불러서 내쫒아 버리자.
“겨……. 경찰을 부르면 나는 서슴없이 널 덮치겠다.”
“뭐?”
“너……. 네놈을 덮치고 경찰이 오면 조크에요 조크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워낙 장난을 좋아해서. 죄송하지만 돌아 가주시겠어요. 조금 바빠서. 라고 네……네놈의 알몸뚱이 위……위에 올라탄 채로 마, 마 마……말해주마.”
그건 또 어디서 나오는 설정이야. 사람 살려. 진짜 변태가 나타났어요. 노출증도 모자라서 남색가였어. 오, 나는 이제 저 변태의 손아귀에 놀아나다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겁니까. 나는 살며시 들고 있던 수화기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경찰에 연락하면 나를 덮치겠다고? 당신 정말 변태야? 그리고 도대체 우리 집에 찾아온 이유가 뭐야.”
역시 변태라는 말에 반응한다. 얼굴이 씰룩씰룩, 얼굴에 붙은 라면 면발들도 함께 씰룩씰룩. 지금 자기 꼴이 어떤지 알긴 하는 건가.
“너, 너 아까부터 자꾸 변태라고 하는데 말이지…….”
음. 자기 입으로 내뱉는 변태라는 단어에도 반응하는군.
“처, 천사한테 그런 망발을 지껄이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니까 그 천사라는 게 뭔데, 컨셉이냐?
“그러니까 그 천사라는 게 뭔데, 컨셉이냐?”
“컨셉이라니. 이 몸은 대천사 미카엘의 신검 수호 기사단을 목표로 하고 있는 천사 김 오다!”
천사가 왜 이름이 그래! 김 오, 외자이름이냐? 까마귀? 금 까마귀? 그런 거야? 앙?
“참고로 금 김에 까마귀 오다.”
세상에.
“무슨 천사가 이름이 그따위야!”
“낸들 아냐!”
아, 별로 마음에 드는 이름이 아니었던 겁니까.
“요즘은 천사들도 담당구역에 따라서 이름을 따로 짓고 있다고. 나는 여기 한반도를 담당하는 지역장인 환인님의 비서인 최 호님의 다섯 번째 수련생이기 때문에 여기 언어로 짓는 수밖에 없었다고. 게다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야. 나라고 이게 좋은 줄 알아? 좀 멋들어지게 꼬부랑글씨로 휘갈길 수 있는 이름이면 좀 좋아? 그래도 환인님이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라 버리지도 못한단 말이야…….”
울고 있어. 아니 진심으로 미안하긴 한데, 이름가지고 놀리는 건 별로 좋은 게 아니거든.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뻥이 좀 심하잖아. 이름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과대망상증에 걸리기라도 한 거야? 아니 뭐 하는 거야. 남의 집 바닥에 자기 이름 같은 거 쓰지 말라고, 게다가 한자잖아.
“그만! 남의 집에 낙서하는 그 경우는 뭐야!”
흐느껴 우는 그녀석의 몸이 들썩일 때마다 땅을 향해 치렁치렁 뻗은 머리카락 뒤로 면발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어이, 이봐 이름가지고 놀린 건 미안한데, 그만 나가줬으면 하거든?"
“……못나간다.”
미치겠네. 어이 아저씨. 옷은 홀딱 벗고 라면을 얼굴에 붙인 채로 울고 있는 날개달린 남자를 집안에 가만히 둘 정도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거든 나는?
“나가. 나가라면 나가지 못나가긴 뭘 못나가! 불법 침입이라고. 범죄라고!”
“못나가. 천사는 자기 이름을 인간에게 밝히면 그 인간과 바로 계약 직행이라서. 그 인간이 죽을 때까지 옆에 붙어 있어야 해…….”
그건 무슨 소리십니까.
“아, 왜 이렇게 되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아니 그보다 일어나지 마라 보면 안 될 곳이 보인다. 어이 일어나지 마!
“환인님 최 호님 죄송합니다. 이 불초소생은 당분간 여기 붙어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이, 뭐하는 거야.”
다가오지 마. 뭐야, 경찰에 신고도 안했는데 덮칠 생각이냐? 울면서 다가오지 마란 말이야. 이상한 말도 하지 마. 기분 나빠.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이 집구석에서는 도망갈 곳도 없다. 이미 벽에 등이 붙어버렸다. 몸에서 번쩍이는 빛이 한층 더 밝아져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어이 내 앞에서 허리를 숙이는 이유가 뭐야. 손목은 왜 잡는 건데.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경우는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건가 보다. 우와아악. 얼굴 치워. 필사적인 도리질 그거다. 어지러워 미치겠네.
“가만히 있으라니까.”
뭔 일입니까. 내 몸은 왜 멈췄습니까. 움직일 수가 없잖아. 얼굴 치워! 제발 살려줘!
“그……. 헙!”
아 라면 냄새는 기분 좋아……가 아니라. 입술이 닿았잖아! 내 첫 키스는 남자랑? 변태한테 빼앗긴 건가. 오, 부디 첫 키스는 평범하게 여자랑 하기를 빌었는데, 이걸로 내 인생도 쫑인가. 어이 눈은 왜 감는 건데? 미치겠네.
“푸하~!”
개운하다는 그 표정은 뭐야. 나는 드럽거든? 기분 정말 최악이거든? 이 빛은 뭐냐. 눈부셔. 아, 금방 사라지는 군.
“자 이걸로 계약 완료입니다. 자 이제부터 너는 내 시종이야. 자 어서 내 라면을 끓여라.”
몸이 움직인다.
“이게 무슨 짓이냐.”
최대한 쏘아보자. 지금 내 기분을 전부 눈으로 응축시켜 쏘아보면 호랑이라도 기겁을 할 거다.
“무슨 짓이긴, 계약 한 거야. 내가 인간계에서는 너한테 최초로 내 이름을 밝혔으니까. 그에 따른 천사와 인간의 맹약이지. 규칙이니까. 그리고 방법이 입을 맞추는 것 밖에 없어서 부득이하게 그렇게 한 거다. 나도 남자 녀석하고 입 맞추는 것 따위 별로 좋은 건 아니다만, 일단은 내 실수기도 하고. 일단 계약을 맺으면 무를 수는 없고, 이제부터 너는 내 시중을 드는 거지. 그러다가 내가 기분이 내키면 너한테 내 천사의 권능을 빌려주는 거…….”
퍼억.
“그런, 인간한테 불리한 계약 조건 따위 인정 못한다!”
금 까마귀 녀석이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야 그렇겠지. 당황스럽겠지. 나도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거든.
“뭐, 뭐가 불리하다는 거야! 인간이 천사의 권능을 볼 수 있는 기회가 흔한 줄 알아!”
화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일단 불리한 계약 조건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애초에 내가 태클을 걸고 싶은 부분은 그게 아니라 왜 사전 동의 없이 계약을 해버렸냐는 것……아니, 이게 아니라 왜 우리 집에 나타났느냐 그거다. 왜 느닷없이 나한테 키스를 했느냐 그거다.
“그러니까 나는 천사란 말이다. 천사. 봐 날개도 있고, 너희들 눈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게 보일 텐데?”
그러니까 대뜸 천사라고 해봐야 누가 믿느냔 말이다.
“증거는?”
“증거?”
“당신이 천사라는 증거를 대보란 말이야. 대뜸 남의 집에 홀딱 벗고 나타나서는 날개나 파닥거리면서 나 천사에요. 해봤자 믿을 놈 하나도 없거든?”
고민하는 표정이다. 저 날개 어께부분에서 자라있고, 인공적인 느낌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정말로 빛나고 있고……. 사실 이미 천사라고 믿어야할 타이밍인 것 같지만, 일단은 개기고 보는 거다.
“음……. 말로 설명해봤자 믿지도 않을 것 같고 또, 귀찮으니까 그냥 내 이 자리에서 천사의 권능이라는 걸 보여주지!”
뭔가 보여줄 생각인 모양인데, 옷이라도 좀 입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뭇 진지한 녀석의 표정을 보니 지금은 태클 걸 타이밍이 아닌가 싶다. 손을 들어 올리고 합장? 아니 기도를 드린다고 해야겠군. 그런 포즈로 녀석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중얼중얼……. 아무래도 남한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말하는 것 같았지만, 미안하게도 내 두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바닥아 깨끗해져라. 바닥아 깨끗해져라. 바닥아 깨끗해져라. 아, 그리고 덤으로 내 얼굴도 깨끗해져라…….”
‘미쳤어.’
분명히 미친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빛이 번쩍 하더니 순식간에 바닥에 흩어져있던 라면이랑 라면국물이 사라졌다. 그놈 얼굴에 붙어있던 라면들도 사라졌다. 확실히 얼굴이 깨끗해지니 잘생기긴 했구나. 그런데 이제 저놈이 천사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 같다. 천사의 권능 치고는 쪼잔 하긴 하지만, 일단 청소할 때는 굉장한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저놈이 천사라는 얘기가 사실이면 내가 저 녀석이랑 계약을 했다는 것도 사실일 거고, 내가 저놈 시종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일 터인데, 하필 왜 시종이지?
“성공이네, 음. 너 이제 믿을 거지? 자 어서 라면 끓여와.”
다짜고짜 라면이라니 무슨 소리야. 아니 아까부터 라면타령을 하긴 했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알아차리지를 못한 것 같다.
“그래 당신이 천사라는 건 믿을게. 그런데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녀석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건 말이야. 일단 네가 내 시종이니까 얘기해두는 건데 말이지. 사실 나는 한국의 라면을 먹으러 왔어.”
“뭐?”
“그 왜 천국에는 라면이 없거든. 라기보다는 안 먹어도 안 죽으니까 식문화가 발달을 못했지. 게다가 온통 열매 없는 나무랑 풀들밖에 없어서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들거든.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예전부터 라면이라는 걸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단 말이지. 천국에서 수행의 일환으로 인간계 관찰만 하다가 이집 저집 라면 끓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도 답답해서 그냥 내려와 버렸어. 그리고 제일 라면이 맛있는 집이 어딜까 찾다가 여기 오게 된 거지. 음 그러니까 너는 천사한테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느낌. 아니 그것보다는 네 라면이 천사한테 선택받은 라면이다 이 말씀이야. 귀중한 말씀 고맙게 들어라.”
아니 안중요해. 뒤로 갈수록 알 수 없는 얘기가 되고 있잖아. 게다가 맨 뒤의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아. 나보다 내 라면이 더 상위클래스냐.
“음 어쨌든. 내가 인간계에 내려온 이유는 라면이 먹고 싶어서야. 그러니까 어서 라면을 끓이란 말이야. 이 종놈아.”
아, 신경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죽이자. 천사건 뭐건 다 때려죽여 버리자.
“우왓! 야 뭐하는 거야. 그만둬. 야 나 천사다. 천사라고. 벌 받을래? 천사의 권능이면 네놈쯤 간단하게 죽일 수도 있어!”
그러면 내가 죽기 전까지 실컷 두들겨 패주마. 이야 죽어라. 죽어버려!
“그만 때려 좀. 아파. 천사도 인간계로 내려올 때는 실체화해서 내려오기 때문에 아픈 것도 느낀단 말이야. 멍도 들어, 팔, 다리도 부러지고 붓기도 한다구! 야, 듣고 있어?”
그냥 무시하고는 사정없이 두들긴다. 천사가 라면이 먹고 싶다고 남의 주택에 불법 침입을 해서는 느닷없이 알몸으로 남의 첫 키스를 뺐어가고는 라면 끓여오라고 시켜? 그게 천사냐 그냥 미친놈이지. 아 짜증나.
“저기…….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응? 사실 나 아직 천사의 권능은 하루에 두 번밖에 못 쓴단 말이야. 저기요, 살려주세요.”
“잘됐네. 그럼 일단 맞자.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내일 천사의 권능으로 치료하면 되겠네. 그 다음 그 권능이란 걸로 나한테 복수하면 될 거 아니야!”
녀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그러게 누가 남의 속을 긁으래? 내가 아무리 여자 복이 없지만 적어도 첫 키스는 여자하고 하고 싶었다고!
“적어도……. 적어도 첫 키스는 여자랑 하고 싶었단 말이다!”
나름대로 흥분해서 되는대로 소리를 질렀는데, 마침 그놈이 듣더니 피식 웃었다. 아마 그 뒤에 마지막 남았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내 무수한 주먹이 그 녀석에게로 날아갔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 시점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석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그 녀석 위에 올라탄 채로 주먹을 높게 치켜들고 있었는데, 그녀석의 불어터진 얼굴을 보니 미안해서 그만 두기로 했고, 그 다음은 지금 이 상황이다.
“오, 먼저 스프를 넣고 끓이는 거냐?”
라면을 끓이고 있다. 얘기해보니 라면만 끓여주면 돌아간다고 하기에. 실컷 두들겨 패기도 했고 미안해서 그냥 끓여주고 있다.
“오, 나는 계란을 하나 풀어주면 좋겠는데.”
“귀찮게 하지 마. 정신 사나워져.”
“오옷! 그거 장인정신이라고 하는 그거냐!”
절대적인 문제점, 귀찮다, 시끄럽다. 라면하나 끓이는 데 이 호들갑은 무어란 말이냐. 어쨌든 원하는 대로 계란 하나 풀어주고…….
“야! 그걸 풀면 우째! 나는 위에 올려놓는 게 더 좋단 말이야!”
“그럼 니가 끓여 드세요. 이거 그냥 버릴까?”
“아뇨. 그냥 먹겠습니다.”
완성. 녀석은 기쁜 듯이 냄비를 받아간다. 그리고는 금방 다 먹어버린다. 라면을 저렇게 맛있게 먹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군.
“맛있어. 역시 맛있어.”
연신 맛있다며 먹어대다니. 그렇게 좋은가? 뭐 이걸로 저 녀석도 돌아가겠고 모든 것이 전부 원상복귀 되겠지. 아니, 내 첫 키스만 빼고.
“아, 열받아.”
녀석이 나를 쳐다본다.
“아직도 계약한 것 때문에 삐져있는 거냐? 남자가 쪼잔 하게 그런 일 가지고 삐지고 그러는 거 아냐.”
“또 맞을래?”
침묵. 아무리 생각해도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다. 어서 먹고 돌아가라. 아무래도 계속 보고 있으면 또 돌아버릴 것 같아.
“다 먹었다. 야, 잘 먹었어. 그럼 나는 간다?”
아 드디어 가는 거냐. 잘 가라. 다신 오지 마라.
“라면 잘 먹었다.”
또 빛. 이동하는 건 하루 두 번 제약에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어느새 그 녀석은 사라져버렸다. 거참 오늘 하루 휘황찬란한 하루가 되 버렸구나. 라면을 조르는 천사라니. 기가 차다. 게다가 첫 키스. 아, 짜증나. 그런데 그녀석이 계약 조건이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계약을 하면 계약한 인간이 죽을 때까지 같이 있어야 한다고…….
“어이. 깜빡했다. 나 너 죽을 때까지는 천국으로 못 돌아가.”
나신의 번쩍거리는 천사님께서는 순식간에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 그 수려한 용모를 자랑하고 계셨다. 하나님 맙소사 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것이 맞겠지.
# by | 2008/02/11 08:34 | └ 어느날천사라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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